욕망과 해석 생각

일상적으로 욕망의 해석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마 프로이트와 그의 정당하거나 부당한 후계자들(주로 국제정신분석협회를 기준으로)의 담론이다. 학술적인 정신분석이든, 사이비 심리학이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해내는 역할이다. 그 담론들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의 해석에 대한 기준이 되고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의 욕망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기술한다.

그러나 욕망의 해석은 해석의 욕망이다. 정신분석의 아버지인 프로이트로부터 출발해서 현대의 수많은 후계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현대적 욕망이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욕망한다. 욕망이 무한해야하는지 유한해야하는지, 어떠한 욕망이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인지 혹은 그러한 구분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지, 욕망이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지 순수하게 바라는 긍정의 형태로서 창조의 힘을 나타내는지 등. 이러한 해석의 욕망 담론은 욕망의 가장 바람직한 모델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표준적인 욕망 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 최근의 분위기를 보자면 비정상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문제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 일은 내가 가장 잘 알까 생각

내 일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자신에 대한 것이니, 그리고 누구도 자신보다 더 자신에게 가까울 수 없으니 이러한 말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하다. 나 자신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잘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한을 둬야한다. 나는 나 자신을, 아무리 많이 쳐줘도 절반 정도만 잘 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항상 수수께끼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수수께끼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단 나 자신을 최대한 알아봤자 반절 밖에 알 수 없다는 바로 이러한 상태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정신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우리가 과연 육안으로 우리의 전신을 살펴볼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몸 전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 가령 거울, 제3자의 눈과 같은 것들. 혹여 굉장한 유연성을 자랑하며 전신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스스로 자신의 몸의 내부를 살펴볼 수는 없다. 자신의 몸의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의료기기의 도움, 의료관계자의 전문지식, 그리고 그러한 일을 행하기 위한 기술을 체득한 사람 등. 그러한 제3의 것들이 필요하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친숙해서 종종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일상용어로 사용해버리고 마는 프로이트의 용어들(무의식, 리비도, 초자아 등)을 통해서 정신적인 측면 역시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히 파헤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물질적인 영역이든, 정신적인 영역이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만의 힘으로는 모두 파악할 수 없다. 만일 자신에 대해서 모두 알고자 한다면, 물론 아마 이러한 기획은 실패하겠지만, 최소한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우리는 타자를 우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오직 제3의 것들, 타자의 시선만이 나 자신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나의 영역을 응시하고, 포착한다. 따라서 타자는 최대한으로 말하자면, 나만큼이나 나를 잘 아는 존재이다. 남은 문제는 타자 안에서 내가 모르는 영역이 어떻게 해석되고 바뀌어가는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취할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은 오로지 그러한 것들 뿐이라는 점이다(이것이 내가 자신을 모두 알고자 하는 노력이 실패할 기획이라고 부른 이유다).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세상? 생각

종종 현대 사회, 현대 문명에 대하여 암울한 어조로 말하고는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한탄은 우리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적인 경향성, 성향으로 인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거나(놀랍게도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는 투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일단 우리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변호를 좀 해보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결코 결론을 얻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 수많은 인간에 대한 탐구의 역사들, 게다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에 관한 수많은 논쟁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사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애초에 우리는 항상 운동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즉 항상 무언가로 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확히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현대 사회의 기묘한 경향성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우리는 완성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지녀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 인간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 인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모를 수도 있지. 아마 영원히 모를 수도 있지. 그런데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많은 것들의 경계가 애매해진 것은 사실 아닌가? 특히나 사회의 윤리나 도덕은 그 경계선이 더욱 애매해졌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경계선도 애매해지지 않았나? 더군다나 '인간성'이라는 것도 현대 사회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것들에 관한 위기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완전히 혐의를 벗을 수 있는가?

이것은 처음에 비하면 더 타당해보이는 지적이다. 확실히 많은 것들의 경계가 애매해졌다. 많은 것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예전의 시선에서 보자면 많은 것들이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그러진 것은 단순히 각자의 자리가 있다는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환상은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마 플라톤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확고한 자기 정체성에 관한 신화는 일종의 정신적 유전자로서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여 유전자 온갖 시대를 가로지르면서 다양한 모습을 취하며 당대 사회에 적응해왔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척박했던 모양이다. 현대 사회의 경악스러운 속도감과 익사할듯한 수다스러움은 구시대적인 환상이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기에는 너무나 급하고 빨랐던 것이다. 아마 현대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모종의 수치스러움은 도덕과 윤리의 상실, 인간성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갑자기 벌거숭이가 된 듯한 느낌에서 오는 것이리라.

가면, 화장의 역할을 했던 환상이 갑작스레 제거가 된다면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점이다. 냉혹한 현대 사회는 우리의 환상을 모두 앗아가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 사회의 운동은 계속 진행중이다. 오직 이것만이 의고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비판이다.

1 2